정 신열(鄭 臣烈)

호: 관정(官亭)

 

타고난 성품이 영특하고 호방하여 굳은 신념으로 학업을 독실이 하였으며, 불교(佛敎)를 힘껏 배척하고 반대로 성리(性理)을 연구하여 당대 유학(儒學)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현종조(顯宗朝)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고 병부상서(兵部尙書)에 발탁되기도 하였다.

 

거란(契丹)의 난에 큰공을 세운 일이있어 특별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받고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은열(殷烈)이다. 소남역(召南驛)이 있는 자리가 상서공(尙書公)이 살던 옛터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역의 남쪽 정자 근처에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큰 나무가 있는데 이것을 공이 심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곳을 관정(官亭)이 라고 일컫고 있는데 이것은 공의 호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묘는 진주 북쪽 성태동(省台洞) 용산(龍山)에 있으며, 그 고을 주지(州誌)에 실려 있다.

 

신도비명(神道碑銘)은 도사(都事) 이종기(李種杞)가 짓고, 참판 정우묵(鄭佑黙)이 썼다. 청계서원(淸溪書院)에는 현감 이원귀(李源龜)가 봉안문(奉安文)과 상향문(常享文)을 지었고,경덕사(景德祀)에 배향하였는데, 문소(聞韶) 김황(金榥)이 상향문(常享文)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