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작성자 少遊
작성일 2015-01-04 (일)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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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世 별세

“조부님의 별세”

     글쓴날 : ‘2014.甲午 4. 25.

마을 고지기 아저씨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밤 우리집 아래채 지붕 위에 올라가 할아버지가 입던 헌옷 한별을 지붕위에 올리고 나서 하늘을 보고 외쳤다

“대한민국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658번지

1896년丙申 4월5일생 정 제 영 ∼ 1962년 壬寅 2월 12일 卒 하셧기에 천지신명님 에게 아뢰옵니다, 복∼! 복∼∼! 복∼∼∼! “

몇일전 부터 할아버지 께서는 건강이 안좋으셔서 어른들 께서는 오늘 내일 하고 계셨다 할아버지의 조카이며 아버지와 사촌 형님이고 나의 큰 당숙 어른도 오셔서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셨다 숨이 가늘어 지시고 드디어 코밑에 따뜻한 감이 없고 호흡을 멈추신것을 확인후 큰당숙 께서는 마을 회관에 거주 하는 마을 고지기 아저씨에게 연락 하시어서 하늘과 땅 천지신명님 에게 아뢰는 의식을 고한후 곡(哭)을 하여도 좋다고 하셨다 그당시 나는 어리기(7세) 때문에 임종을 하는 방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자만 보고 들은 기억이 새롭게 뜨오른다

복~! 복~! 복~! 하고 외침이 끝나자 드디어 모두 참았던 곡이 터졌다 이제부터 초상집이 시작 된것이다 어릴 때 우리 집터는 약 600평 정도 였는데 건물과 장독대 텃밭을 제외하면 그중 한 400평은 마당이었다 마당에는 득석을 펴고 손님을 맞느라고 시장의 장터 같이 분주 하였다 인근 마을 어른들과 친척등 문상객으로 마당에는 빽빽이 손님이 들어 찾고 마당 한편에는 붓을 들고 哀感錄(애감록)과 賻儀(부의)록을 기록하는 분이 계셧다 붓글씨로 기록하였던 것이 50년이 지난 최근 까지도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안보여 아쉽다 출상 하는날은 꽃상여를 메면서 집 앞에서 상두꾼이 이제가면 언제오나 북망산천 어서가자 라고 하면 상여꾼들은 어~허 어~허 어허영차 어~허 라고 우렁찬 목소리로 화답하고 또 상두꾼이 꾕과리로 장단을 맞추면서 옥겉은 우리손자 이제가면 언제볼꼬 라고 사설을 하면 또 상두꾼이 어어 ~어허 ~어허영차어허 ~ ! 라고 화답하고 상주 들은 곡소리로 화답하고 하였다 한참을 왔다 갔다 뜨나기 싫은듯 매우 어렵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가시는 길을 뜨나시는는 듯 하였다

대문앞에 차려진 상여 앞 제단에서 제상을 진설하고 축문을 읽은다

靈輀旣駕往卽幽宅 載陳遣禮永訣終天(영이기가 왕즉유택 재진견례 영결종천)

이미 영혼은 상여 에 오르셧고 그윽한 유택으로 가시게 되었읍니다

이제 하늘로 가시는 이별의 길은 멀기만 합니다 여기 조촐 하오나 한잔의 술과 안주와 진지를 올리 오 니 흠향 하시옵소서“

집례자는 낭낭한 듯 구슬픈 듯한 목소리로 축문을 읽고 나면 다시 큰소리로 곡을 한다

발인제를 지내고 꽃상여의 긴 행열 과 울긋 불긋한 천을 대나무에다 걸고 삶과 죽음의 이별을 슬퍼하는 글귀를 쓴 만장을 앞세우고 우리집에서 마을입구까지 길게 사람들의 행열은 따라갔다 어린 나에게도 삼베로된 상복과 지팡이를 들려 주셨지만 지금 생각 해보니 별로 슬픈것 같지도 않았고 형님들은 웃으면 안된다고 주의를 주었지만 나는 아무렇치도 않았던것 같았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붐비니 무슨 잔치집 같은 든든한 분위기를 느꼇던것 같았다 그때가 내가 최초로 느껴본

장례식의 행사였다 지금은 장례식의 절차도 옛날과는 많이 달라져서 상업적 장례식 업체 도우미들이 주관하는 시대가 되었다 꽃상여도 보기 힘들고 세월과 함께 많이 달라졋다

우리가 살면서 많은 죽음과 이별의 아픔을 격게 된다 싫든 좋든 피하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다 그후 할머님의 안타까움은 수시로 산소에 가서 엎드려 울면서 곡을 하셧다 슬프게 한참동안을 그렇게 우시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또 집에는 장남 이셧던 아버님 께서는 사랑채에 할아버지가 계시든 옆방을 개조해 빈소를 차려놓고 아침 저녁으로 진지 상을 올리며 곡을 하셨다 이른바 3년상 이라는 것이었고 산소 옆에 다가 움막을 짓고 살았다 아버지와 할머니와 나는 산소에서 한 5 미터 옆에 다가 토담에 초당  을 짓고 3년 동안을 살았었다 지금 생각 해보니 그것이 3년 시묘살이 란 것을 지금 이글을 쓰는 순간 깨닿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알게 모르게 할아버지 산소 옆에서 시묘살이를 한것 이다 몇 년후 할머님의 별세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내곁을 뜨나셨다 생각 해보면 삶과 죽음은 피할수 없는것 이다,

삶은 한조각 구름의 생김이요 멸은 한조각 구름의 흩어짐 이다(浮雲生 浮雲滅 부운생 부운멸) 라고 하지만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잊었든 일들이 다시 생각이 나면서 가슴이 미어질것만 같다 누구에게 든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슬픈것이다 라고 스스로 위로 해본다

내가 근무하는 진주노인병원에서도 많은 어른들께서 계신다 젊은날들의 추억을 간직한채 병상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가까이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예견하고 있을것이다 산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젊음과 패기와 뜨거운 정열로 산전 수전 다 겪어셧지만 이제는 힘차게 비상하던 날개도 다 떨어지고 머리도 빠지고 그날만을 기다린다 오늘 새벽에도 한분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장례식 회사에서 와서 영구차에 싣기 위해서 손 카를 밀고 나가신다 그런데 오늘은 유난히 아들인 듯한 가족 한분이 밀고 가는 카를 따라 가시면서 손수건을 입가에 대고 흐느끼는 듯 고개를 숙이고 손수레용 영구카를 뒤따르신다 마치 장례식장에서 상여를 따르는 듯한 모습이다 아~! 요즘도 저렇게 하시는 분이 있구나 하고 작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별세하시고 장례식장으로 가는것을 여러번 목격 하였으나 저런 분을 목격 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 인듯 햇다 대부분 긴병에 효자 없다고 오늘 내일 하다가 돌아 가 시면 장례식 회사에 위탁하여 장례식장 으로 서둘러 보내고 나는 나대로 장례식장 으 로 따라가기 바쁘기 때문에 손수건을 들고 시신을 따르며 안타까운 몸짓을 하는 것 은 퍽 드물게 보는 일이었다

어릴적에 집안 어른 이시든 나물아재(春崗 정재열)께서는 儀禮便覽 의례편람,(서울 한풍출판사,단기4291년,서기1958)이라 는 관혼상제 절목을 편찬 하여 보급 하셨다,책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다 그러므로 자고로 예의를 아는 자는 존귀 한 사람이 되고 알지 못하는 자는 비천한 사람이 된다“ 라고 하였다 지금 만약 주자 가례 를 찿는다면 나보고 조선시대 사람 이라고 사람들은 비웃거나 머리가 좀 어떻게 된 사람 이라고 수군 거리겟지 ....부득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야만 될거 같다 .... ! 

 

邙山(망산) . 沈佺期(심전기)

북망산 위엔 무덤이 널려있어

만고천추 토록 낙양성을 바라보고 있다

성중에 밤낯으로 풍악소리 들리는데

산위엔 송백 사이로 바람소리만 들린다

北邙山上列墳塋 萬古千秋對落城 城中日夕歌鐘起 山上唯聞松柏聲

북망산상열분영 만고천추대낙성 성중일석가종기 산상유문송백성

 

참고서적 : 唐詩精解(당시정해) 단기4289년(서기1956) 학원사 발행 임창순 번역

- 邙山(망산) .沈佺期(심전기) ( ∼714 初唐. 하남성 내황현인 字 雲卿(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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