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동정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3-08-24 (토)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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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영선생 경남일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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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한재 정규영
강동욱 기자
 하동군 금남면 대치(大峙)마을. ‘한재’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에는 예부터 진양정씨 은열공파 후예들이 살아왔다.
 입향조인 오봉(鰲峰) 정대수(鄭大壽)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을 도와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이 남해안의 전략적 요충지인 곤양을 확보하는 것을 포기하고 물러가도록 하는데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오봉의 후손들이 지금도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앞으로는 탁트인 남해 바다, 뒤로 우뚝 솟은 금오산이 병풍처럼 자리해 부귀와 명성이 끊어지지 않을 마을로 느껴졌다.
 마을 가운데 서서 남해 바다를 바라보니, 문득 옛날부터 많은 선비들이 남해 바다와 금산 유람을 할 때 반드시 한번 쯤 들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1877년 가을, 당시 영남학맥을 주도하고 있던 한주 이진상이 만성 박치복, 후산 허유 등 여러 선비들과 남해 금산을 유람하고 이 마을에 머물면서 강론을 했다.
 당시 한주 일행은 수은(睡隱) 원휘(元暉)의 집에서 강론을 했는데, 그는 행실로 일대 명망이 높았던 선비였다. 한주 일행의 강론 때 수은의 아들이 정성을 다해 어른들을 모셨으니, 그가 바로 한재(韓齋) 정규영(鄭奎榮)이다. 이때 한주 선생이 그의 자질을 칭찬하며 학문의 방법을 일깨워 주었다.
 한재는 1860년 대치마을에서 태어났다. 3살 때 모부인 하씨가 세상을 떠나자 형수의 품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경서를 부지런히 읽어 문리(文理)를 터득해 나가자 마을 어른들이 한 가지를 가르치면 열가지를 안다 라고 칭찬을 하였으나, 부친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학문을 연마하도록 면려했다. 관례를 하는 날에 친척과 벗들이 모두 즐겁게 생각하는데 홀로 벽을 향해 우니 대개 모친 생각 때문이었다. 효성의 지극함을 엿볼 수 있다.
 1879년에 장인을 따라 성재 허전을 서울에서 뵙고 경서와 예의에 대해 질정하고 한달간 머물면서 여러 동문들과 공부를 하다가 돌아왔다. 이때 한재를 성재 문하로 이끌었던 장인 죽와(竹下) 조용주(趙鏞周)는 대소헌의 후손으로 문학에 조예가 깊은 선비였다.
 성재 문하에서 한 달간 머물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돌아온 아들을 본 부친은 기뻐하면서 “이번 너의 소득이 과거급제보다 낫다”고 했다.
 한재는 효성이 지극했다.
 부친이 병이 나서 백약이 무효였다. 이때 한 의사가 사찰의 황금탕(黃金湯)이 특효라고 하자 곧 다솔사로 가서 날마다 한 그릇씩 마련해 4년동안 부친을 봉양했다. 다솔사까지 거리가 30리였다. 부친이 임종에 즈음하여 삼종형인 교재 정원항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효자입니다. 형님께서 전말을 기록하여 그의 아우인 해영에게 주십시오”라며 곧 세상을 떠났다. 이후 교재는 유언에 따라 후산 허유에게 ‘효행실록(孝行實錄)’이란 글을 부탁하였다.
 후산은 ‘효행실록’에서 한재의 효행을 공자의 제자 민자건에게 비유했다. 민자건은 공자가 그의 효행을 칭찬할 만큼 드러난 효자였다.
 1884년 상복을 벗고 서울로 올라가 성재 선생에게 문안을 드리고 수개월을 머물렀다. 성재 문하에 있을 때 학문과 행실이 알려져 조정에서는 선공감 감역의 벼슬을 제수했다.
 벼슬을 받은 한재는 판서 민영익에게 글을 보내 완곡히 사양을 했다. 자신의 부덕함과 시대가 어지러운 점을 들어 사양한 것이다.
 한재는 더 이상 서울에 있지 못하고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명성이 조정까지 알려지자 고을의 군수가 융숭한 대접을 하는 등 삶이 번거러워질 것을 예견하고 이듬해 식솔들을 거느리고 황매산 골짜기로 이주를 했다. 독서와 산수를 벗삼아 생을 마치고자해서였다. 벗이 오면 술을 대하고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한 생을 보냈다. 이러한 생활을 한지 얼마되지 않아 상배(喪配)를 당하자 이듬해 팔계 정씨를 맞이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1년 가을에 면우 곽종석을 비롯한 명유들이 방문하여 하루를 머물며 강론을 했으며, 함께 배를 타고 노량을 건너 남해 금산 등 절경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당시 면우가 그를 일러 ‘충담아원(충澹雅遠)’하다고 했다. 즉 ‘성정이 맑고 깨끗해 아취가 뛰어나다’ 는 의미이다.
 이듬해 거창으로 면우를 방문해 심학도설(心學圖說), 사단칠정론 등에 대해 질정을 했다. 1903년 봄에는 마을에 ‘우천정(愚泉亭)’을 짓고 독서를 하며 주위 산수를 즐겼다.
 1907년에 조정에서 통정대부 비서감승(정3품)을 제수했다. 한재가 많은 공을 쌓아 조정에 이를 보고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한재는 마을에 있는 오산재(鰲山齋)와 우천정에 서당을 열고 두산 강병주를 초빙해 마을의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1909년 4월 고향 대치리에서 자신이 운영해 오던 서당을 폐지하고 그 자리에 4년제 사립 현산(峴山)학교 (구. 김양분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6년동안 교장직을 맡았다. 한재는 시대가 어지러운 때를 만나 자신은 뜻을 펴보지 못했지만, 미래의 희망을 심기 위해 교육사업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것이다.
 늙으막에 우천정에 기거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비분강개하는 날들이 많았다.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면우에게 글을 보내 춘추대의를 밝히니, 면우가 그의 뜻을 살펴 파리장서에 서명을 권유해 파리장서 서명에 가담했다. 얼마후 파리장서 일로 면우가 불행히 세상을 떠나자 한재 역시 애통해 하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병을 앓아 1921년 향년 62세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한재의 나라사랑 정신은 그의 아들 물헌(勿軒) 정재완에게 전해졌다. 물헌은 1919년 백산(白山)상가의 주식회사 전환 당시 주식 500주를 출자하여 백산상회 하동연락사무소를 운영하면서 비밀리에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하기 위한 노력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하동경찰서에서 오랜기간 문초를 겪었다. 또, 조국의 광복을 되찾는 길은 육영사업에 있다며 전답(田畓)을 팔아서 민족학교 개교 등에 많은 자금을 내어 놓았다. 1923년 일신고등보통학교(현 진주 여자고등학교의 전신) 설립자 총회에서 자금을 출자하여 이사에 피선되면서 학교 설립의 기초를 마련했고, 동래 일신여학교(현 부산동래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의 설립에도 많은 자금을 출자한 애국지사였다.

 사진설명: 한재 친필 과거답안지.우측 하단에 유학 정규영 26세 거 진주부 곤양현이라는 글이 있다.
 

파리장서 서명 정규영 선생 건국포장 추서

진주 3·1운동 지원 등 전재산 독립운동에 바쳐

경남일보 2013.08.12 00:00 입력



파리장서에 서명한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출신 정규영(1860∼1921) 선생이 제 68주년 광복절을 맞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 받는다.


하동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수종 회장이 지난해 10월 30일 정규영 선생 공적서를 국가보훈처에 올린 것이 이번에 결실을 보게 됐다.


이 과정에는 하동독립운동기념사업회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하동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의 2년간에 걸친 자료수집 등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9일 정재상씨에 따르면 “이번에 건국포장을 받는 정규영 선생은 영남 유림의 태두인 면우 곽종석의 문하로 통정대부 비서감승(정 3품)과 하동향교 전교에까지 오른 유림이자, 경남 최고의 갑부로서 그의 아들 정재완과 함께 전 재산을 민족과 조선 독립을 위해 바쳤다”고 밝혔다.


또 정규영선생은 1919년 3월 스승 곽종석과 심산(心山) 김창숙 등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유림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제 1차 유림단 의거(파리장서 사건)에 깊숙이 개입된 독립운동가이다. 정규영 선생은 당시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명 중 85번째 이름이 올라 있으며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돼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현재 서울 장충단 공원 내 기념비에 그의 이름이 각인돼 있고 탑골공원에 33인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다.


파리장서 사건은 곽종석 등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유림들이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 조국 독립을 국제 여론에 호소하려다 일경에 발각돼 실패한 사건으로, 많은 유림들이 체포·구금돼 옥고를 치렀다.


정규영 선생은 곽종석, 하겸진, 김복한 등 137명과 함께 조선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탄원서를 작성 서명하여 이를 김창숙에 의해 상해를 거쳐 파리로 보냈다.


이때 그는 당시 자금 총책인 김창숙에게 거사자금으로 500원을 아들 정재완을 통해 전달했다.


또 그는 파리장서 사건에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조국의 장래는 교육에 있다고 판단 경술국치 한해 전인 1909년 4월 향리 경남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에 자신이 운영해오던 서당 육영제(育英齊)를 페지하고 그 자리에 일족인 정해영, 정회협 등과 함께 출자하여 4년제 사립 현산(峴山)학교(현 김양초등학교 전신)을 설립했다.


그는 6년간 교장직을 맡으며 육영·계몽사업 등을 통해 민족혼 고취에 심혈을 기울이며 전 재산을 털어 광복을 위한 거친 삶을 산 선각자였다.


또한 정규영 선생은 하동, 진주 기미년 거사(1919년 3.1운동)를 위해 당시 하동·진주·진교·사천·곤양 등지에 독립만세운동 준비를 위한 많은 재물을 지원하기도 했다.


정규영 선생은 얼마 후 파리장서 일로 면우 곽종석이 세상을 떠나자 그 역시 불안한 마음으로 병을 앓다가 1921년 6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는 금남면 노량리 봉화곡 대로상 해좌에 있다


 

※ 자료제공 : 진주 原泉
 

 

<포장증>

 
 


<정규영 공의 증손녀(제일 우측)>

 

※ 사진제공 : 서울대종회 鄭鉉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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