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헌 정천익선생 사적비(退軒 鄭天益先生 事蹟碑)

 

비는 일명 「流芳百世碑」라고도 칭하는데, 진양정씨 은열공파 후손인 鄭天益(諡號-文忠, 號-退軒)先生의 목면시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문충공사적보존회가 국내 저명인사들의 참여로 구성되어 목면시배유지(경남 단성군 사월리 배양부락)에 건립 계획으로 추진되었다. 建碑委員長에 초대 문교부장관과 참의원을 역임하신 안호상 박사를 추대하였고 고문에는 독립투사 광복회장을 역임하신 이갑성선생과 국회의원을 지내신 정우식(산청) 의원을 추대하여 비의 건립을 추진하여 牛峰 李丙燾(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박사 謹撰, 一中 金忠顯(서예대가, 김응현선생 중형 伯兄은 김창현)선생 근서로 고려사와 태조실록에 의거, 박정희대통령의 친필 휘호인 「流芳百世」를 받아(1976년 4월 25일) 비의 前面에 刻字하여 현재 진주성지 내 청계서원에 건립되어 있다. 유방백세(流芳百世)는 “향기가 百代에 걸쳐 흐른다는 뜻으로, 꽃다운 명성이 후세에 전함을 비유한다.” 이 말은 중국 동진(東晉)의 장군 환온(桓溫 312∼373)의 고사(故事)에서 유래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의 원본은 五里霧中이나, 원본의 사진은 국가기록원에 남아 보존 되어 있다.

 

■ 高麗史(고려사) 111卷 46編

文益漸晉州江城縣人 恭愍朝登第累遷正言 奉使如元因留附德興君 及德興敗乃還 得木棉種歸屬其舅 鄭天益種之 初不曉培養之術 幾槁止一莖在比三年遂大蕃衍 其取子車 繅絲車 皆天益創之

  문익점은 진주 강성현인으로 공민왕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몇 번 올라 정언으로서 사신을 받들고 원나라에 갔다가 덕흥군에게 머물러 붙었다가 덕흥군이 패하고 돌아 올 때 목면씨를 획득하여 돌아와 그 장인께 맡겼고 장인 정천익이 심었는데 처음 심은지라 그 배양기술에 밝지 못하여 거의 싹 튀우지 못하고 단 한 알의 씨앗이 싹이나 자라게 되어 3년 동안 크게 번식시켰으며 그  「씨아」와 「물레」도 다 천익이 창제한 것이다

 

■太祖 14卷, 7年(1398 戊寅 / 명 홍무(洪武) 31年) 6月 13日(丁巳) 1번째 기사

○丁巳/前左司議大夫文益漸卒。 益漸, 晋州江城縣人。 父淑宣登第不仕, 益漸承家業讀書。 恭愍庚子, 登科, 調金海府司錄。 癸卯, 以諄諭博士, 陞左正言, 爲計稟使左侍中李公遂書狀官, 赴元朝。 將還, 見路傍木緜樹, 取其實十許枚, 盛囊以來。 甲辰, 至晋州, 以其半與鄕人典客令致仕鄭天益, 種而培養, 唯一枚得生。 天益至秋取實至百許枚, 年年加種, 至丁未春, 分其種以給鄕里, 勸令種養。 益漸自種, 皆不榮。 胡僧弘願到天益家, 見木緜感泣曰: “不圖今日, 復見本土之物。” 天益留飯數日, 因問繰織之術, 弘願備說其詳, 且作具與之。 天益敎其家婢, 織成一匹。 隣里傳相學得, 以遍一鄕, 不十年, 又遍一國。 事聞, 洪武乙卯, 召益漸爲典儀注簿, 積官至左司議大夫。 卒年七十。 至國朝, 以議者之言, 贈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江城君。 子三, 中庸、中實、中啓。

 

전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 문익점(文益漸)이 졸(卒)하였다. 익점(益漸)은 진주(晉州) 강성현(江城縣) 사람이다. 아버지 문숙선(文淑宣)은 과거(科擧)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익점은 가업(家業)을 계승하여 글을 읽어 공민왕 경자년708) 에 과거에 올라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순유 박사(諄諭博士)로써 좌정언(左正言)에 승진되었다.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緜)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갑진년에 진주(晉州)에 도착하여 그 씨 반으로써 본고을 사람 전객 영(典客令)으로 치사(致仕)한 정천익(鄭天益)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천익(天益)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이르러서는 그 종자를 나누어 향리(鄕里)에 주면서 권장하여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아니하였다. 중국[胡]의 중 홍원(弘願)이 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木緜)을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하였다.

“오늘날 다시 본토(本土)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천익은 그를 머물게 하여 몇일 동안을 대접한 후에 이내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으니, 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주고 또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서 1필을 만드니, 이웃 마을에서 전하여 서로 배워 알아서 한 고을에 보급되고, 10년이 되지 않아서 또 한 나라에 보급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니 홍무(洪武) 을묘년에 익점을 불러 전의 주부(典儀注簿)로 삼았는데,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가 졸(卒)하니, 나이 70세였다. 본국의 조정에 이르러 의사(議事)하는 사람의 말로써 참지의정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 강성군(江城君)으로 증직(贈職)하였다. 아들은 세 사람이니 문중용(文中庸)·문중실(文中實)·문중계(文中啓)이다.

 

■ 퇴헌 정천익선생 사적비문(退軒 鄭天益先生 事蹟碑文)

過去의 우리 文化는 너무나 精神面에 偏重하여 物質을 勿視한 嫌이 없지 않았다. 精神面도 重하려니와 物質을 開發 혹은 導入하여 盛히 利用厚生에 이바지함에서 빛난 發展을 이룩할 수 있다. 이런 意味로 볼 때 저 高麗末葉 元에서 綿種取來와 그 栽培는 우리의 物質生活 特히 衣 生活에 一大革命을 일으킨 만큼 그 意義가 深長하였다. 綿種의 取來에는 三憂堂文益漸의 功이 勿論 컸지만 그 栽培 傳播에 成功하여 우리 實生活에 福利를 갖다준 분은 退軒鄭天益先生이었다. 先生의 貫은 晉陽이요 殷烈公의 後裔이니 이 鄭氏는 東方의 望族으로 代代로 纓이 그치지 않았다. 先生은 高麗禮儀判書 諱愈의 아들로서 天資가 聰明英特하며 孝友가 지극하고 學文이 뛰어나 科擧에 壯元하여 官이 典客令에 이르렀다. 그러나 때의 政治가 문란하여 士氣를 잃은 先生은 벼슬을 버리고 江城 今 山凊郡 丹城으로 落鄕하여 自然과 學問으로 벗을 삼아 餘生을 보냈다. 同鄕의 文士로 先生의 사위가 된 文益漸도 學識이 出衆하여 恭愍王朝에 登第 同王十二年(1363年)에 書狀官으로 元都에 갔다가 歸路 綿田에서 種子 十枚가량을 取하여 왔다. 綿은 본시 印度를 發祥地로 하여 中國에 輸入 元代에는 널리 栽培되었다. 文公은 그 取來한 綿種의 一半을 장인先生에게 드려 심게 하고 一半은 자기가 試植하였다. 文公의 試植은 모두 失敗하였으나 先生의 그것은 겨우 一枚의 得生으로 百枚가량의 實得을 보았다. 그 후 年年 加種하여 同王 十六年에는 鄕人에게 주어 栽培케하여 큰 成果를 거두어 先生의 綿種 始培에 成功한 鄕里를 培養村이라 改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 때 先生은 取子車(시아)와 소사거(물레)를 創造하였는데 또 마침 元僧 弘願이 先生宅에 過入 木棉을보고 驚歎함으로 先生은 며칠 집에 묵히고 織造의 術을 자세히 물어 드디어 織造機를 製造하여 家婢를 시켜 一匹의 綿布를 織造케하였다. 이로부터 隣里에 學習傳播되여 十年안에 全國에 普遍되었다. 先生의 崇高한 人格과 功績은 歲月이 지남에 따라 널리 알려져 朝鮮太宗朝에 先生을 晉陽君에 文公을 江城君에 封하고 先生의 諡를 文忠, 文公의 諡를 忠宣이라 내렸다. 그리고 純祖 33年에는 晉陽馬洞에 淸溪書院을 세워 先生을 享祀하였다. 아아! 선생의 愛國愛族의 높으신 精神과 一枚得生의 綿種으로써 마침내 우리 衣 生活과 衣料 産業에 新紀元을 짖게한 그 功勳이야말로 길이 겨레의 큰 龜鑑과 횃불이 될 것이다. 先生의 木綿事蹟碑를 建立코자 建立委員會長 安浩相氏와 鄭在宇氏가 나에게 찾아와 碑文을 請託함으로 나는 그 意義 깊은 일에 感激하여 감히 사양치 않고 拙文으로 대략 위와 같이 엮어 놓았다.

1974년  월  일

後學 李丙燾 謹識